아버지 이제야...

작성자 조금엽

등록일 1999-09-08

조회수 1498

청년 두 사람이 베란다 가득히 자리잡고 있던 화분들을 옮겨내고 있었다. 

저 화분은 어머니가 사주신 것이고 
그 화분은 음악회를 하던 날 친구가 보내온 것이고 
이 화분은 국화향 아름답던 어느 가을날 시장바구니를 들고 샀던 것이고... 
크고 작은 화분 하나하나는 이처럼 나름대로의 사연을 담고 있었다. 

그 중에는 10년 가까이 정이 든 것도 있어 
모른 체 하고 떠나보내기란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잡은 손 억지로 떼어내듯 차에 싣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을 따라온 지 15년,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나는 이 동네를 떠나면 살 수 없는 사람처럼 
아파트 한 모퉁이에 둥지를 짓고 머무르고 있었다. 
어디든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나에게 있어 새롭게 정들이는 건 수월한 일이 아니었기에. 

마음 같아선 숲 속이나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보금자리를 정하고 
날씨와 계절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자연을 대하며 
한 곳에서 해가 뜨고 지는 걸 바라보고 싶었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집을 구하는 데도 우선순위가 있었다. 
아이들. 
이것저것 욕심이나 불편이야 감수한다 해도 
아이들의 교육여건을 접을 수는 없었다. 
(에구~ 어쩔 수 없는 엄마의 이 마음을 두 녀석이 알기나 할까?) 

그리하여 오랫만에 큰 마음을 먹고 움직여 보려했던 시도는 불발로 끝이 나고 
나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이사를 할 마음이었으니 집안을 새롭게 정리해보자는 남편의 제안대로 
대대적인(?) 수리를 위한 기초작업 중 하나가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물레방아와 
초록의 향기를 뿜어내던 베란다의 화초들을 시집 보내는 일이었다. 

악수를 하듯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뭇잎을 쓰다듬으며 무언의 인사를 나누다가 
나를 시집 보내시던 날 아버지의 심정이 
어쩌면 이와 같으셨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 한 모퉁이엔 포도나무를, 
화단에는 철따라 예쁜 꽃들을 심으시고 새로운 꽃이 필 때마다 
언니와 나를 불러 꽃밭에 앉게 하시고는 
카메라 렌즈 속에 비추인 우리들의 모습을 즐거이 바라보셨던 아버지, 
국어 선생님은 어떻고 수학선생님은 어떻고 학교에선 무슨 일이 있었고 
모 남학생이 어쩌고 저쩌고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던 우리들의 재잘거림을 
미소로이 듣고 계셨던 아버지. 
어떤 화초를 이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게 키울 수 있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당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따라가겠다고 했던 날, 
아버지의 심정은 또 어떠하셨을까? 
내 나이 마흔, 이제야 겨우 헤아려보는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 
오늘따라 언제나 따스했던 아버지의 큰 손이 생각납니다. 
철딱서니 없는 작은 딸은 언제나 철이 들까요? 
그래도 아시죠? 
아버지를 사랑하는 제 마음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