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에

작성자 조금엽

등록일 1999-08-13

조회수 2427

꼬맹이었던 오래 전 옛날, 아버지께선 작은 상자 하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태엽을 감은 후 상자를 열면 "딩동~♪딩동♬" 예쁜 음악이 울려나는...
나는 그 상자 속에 핀이며 생일 때 받은 목걸이며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산 반지며 바다에서 주워온 작은 돌멩이와 조가비 같은 나름의 보물을 넣어두고 행여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소중히 간직하곤 했었지요.

가끔 익숙한 멜로디를 들으며 보물상자를 열어서
목걸이도 걸어 보고 조가비를 들여다 볼 때마다
그 상자 속에 비밀스런 내 보물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꼬맹이가 자라서 여학생이 되고 숙녀가 되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오 늘도 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굽이치는 강물처럼 세찬 흐름을 계속합니다.
되돌이키거나 머무르게 할 수 없는 어느 순간을 못내 아쉬워 할 때도 있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시간의 흐름이야 어찌 하나요?

하지만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기억'이란 이름의 또 다른 시간,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다 해도 마치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는 특별한 시간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의 영롱한 보석들, 우정이란 이름의 어여쁜 보석들...
계산에 능하지 않았던 순수의 시절에 사랑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되었던 모든 일들은 오늘날 보물이 되어 우리네 가슴 속에서 반짝입니다.

나이가 들고 세상과 마주하는 똑똑함(?)을 배워갈 무렵,
사람들은 우리를 기성세대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이제 더 이상 꿈이나 동화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여기게 되었구요.

그러나 나는 믿고 있습니다.
동화를 말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고 말하는 그대의 가슴에도,
일상의 얼굴로 무표정하게 살아가는 그대의 가슴 한 켠에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나는 보물상자 하나 품고 있음을.
귀밑에 흰 머리카락이 생겨나고 눈가에 주름살이 생겨난들 어떠할까요?
그대가 보물상자를 여는 순간, 시계바늘은 20년의 세월도 어제만 같이 되돌려 놓고
정지되어 있던 시간은 생명력을 얻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대의 현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먼지 가득한 어른들의 시간 너머에 있는 순수의 시절로 안내할 겁니다.

사막처럼 뜨거운 태양 아래 서 계시다구요?
조용히 눈을 감고 녹슬어 있는 그대의 보물상자의 태엽을 감아 보세요.
거기다 가고자 하는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그때의 그 노래가 배경음악이 된다면 금상첨화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