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득...

작성자 조금엽

등록일 1999-10-20

조회수 1993

밤 10시가 넘어서 걸려온 뜻밖의 전화,
화들짝 반가움으로 목소리의 톤이 높아진다.

오늘은 종일 '정지'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살아온 세월,
어떤 만남은 매우 친밀한 것 같았는데도
이제는 의식의 저편으로 가물가물해져 가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만남은 학교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키 큰 은행나무처럼
무덤덤히 삶의 어느 모퉁이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퇴색되지 않은 빛깔로 남아 있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한 빛깔로 되살아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전화의 주인공도 그랬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전화라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끝에
그 가정과의 처음 만남의 때를 헤아려 보니 어언 10여년...
나는 한창 때(?)인 30대 입문을 앞두고 있었고
그분들은 팔팔한(?) 30대 후반이었다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후 나는 그분들과 떨어져 살게 되어 얼굴을 대하는 기회가 적어졌고
그분들 역시 몇 년 동안 교환교수로 해외로 나가 있었던 까닭에
자주 안부를 전하거나 만날 수 없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사실 그랬다.
영화의 주연배우처럼 아름답던 부인의 모습은 중년부인답게 변했고
그래도 젊은 오빠였던 바깥분의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해졌으니.
하지만 계산없이 서로에게 열린 정겨운 마음은 세월을 건너뛰게 하고
시간을 정지시키기에 충분한 힘이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밤,
아직도 내게 그들이 남아 있음을 감사하는 밤이다.

바쁜 일들로 정신없을 때에도 불쑥 찾아가는 내 목소리가 반가운 사람,
몇이나 될런지?
그리움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면 내 이름이 생각나는 사람,
몇이나 될지...
20년을 못만나고 10년을 못보고 5년을 못보고 3년을 못 보아도
어제 본 듯 어색하지 않은 악수 나눌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 지...
시간의 흐름을 정지 시킬 수 있는 그 사람, 내겐 몇이나 있는지...

모든 이가 내내 소중한 사람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가을날,
나는 문득 그 사람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