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렇게 살지마

작성자 조금엽

등록일 2000-12-11

조회수 1603

종합병원 진료 시간이 마감될 무렵, 1층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원무과 앞에도, 약국 앞에도 몇 사람이 앉아 있을 뿐이었
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추느라 바삐 달려왔는데 다행히도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한 모양이었
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의과대학 캠퍼스가 내다 보이는 창문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늦가을을 보았습니다.
최근 들어 이런 저런 일로 병원에 올 일이 잦아지면서 한 번쯤은 은행잎이 아름다
운 저 길을 걸어 보겠노라 마음은 먹었지만 막상 예정했던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
아가기가 바빴습니다.
차 한 잔, 밥 한 끼 같이 먹자 해도 뭐가 그리 분주한 지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나
를 보며 “ 우리 왜 이렇게 사는 거니?”라고 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어디
늘 그렇겠냐고, 이 모퉁이만 돌아서면 나도 매일마다 산에 가고 운동도 하고 자주
만나서 수다도 떨자고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분간은 쉬운 일은 아닐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심코 에스컬레이터 쪽을 보았습니다. 가운을 입은 한 사람이 만면에 미소를 띄
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길이 향하고 있는 현관 출입구 쪽에
는 아가씨 한 사람이 같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사랑하고 있
는 이들의 모습이 예뻐 보였습니다.

순간,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처럼 '기다림'이란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불현듯 세 음절의 이 말이 가슴을 치고 지나갔습니다. 설레임으로 손꼽아 기다리
던 날들,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던 기다림의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떠나간 임을 기다리다가 그리움에 지쳐 꽃이 되어 버린 전설을 굳이 들먹이지 않
아도 기다림이란 말 속에 그리움이 담겨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움과 떼 놓을 수 없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가슴 저림, 눈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이 부정적인 느낌보다 아름다운 느낌으로 기억되는 것은 기다림의 뿌리에 낙동강보다 깊고 넓은 사랑이란 강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것
입니다.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사랑하기에 그립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통 중에라
도 긴 기다림의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을 테니까요.

연인도, 친구도 아닌 사람을 기다리는 흐린 날의 오후,
고작 이만큼 살고서 다 산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냉랭한 초겨울의 날씨 만큼이나 건조하게 살고 있는 나를 탓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립니다.
“너, 그렇게 살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