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가방

작성자 조금엽

등록일 2004-12-19

조회수 1324

일을 마치고 방송부를 나오려는데 나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오던 그녀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가방이 무거워 보여요. 인생의 짐 같아요.”
출입문이 닫히고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한 자락 미소가 스쳐갔습니다.
아직은 청춘인 그녀가 인생에 대해 불쑥 내뱉은 심오한(?) 말이 대견스러웠던 걸까요?

그녀의 말대로 내 가방은 정말 크고 무겁습니다.
거기다 다른 이에게 들어달라고 맡기는 일은 거의 없으니 더러 오른쪽 어깨가 쳐지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가방이 걷는지 내가 걷는지 모르겠다며 조크를 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가방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해 전 어쩌다 내 것이 된, 임자를 찾던 가방이 내게로 온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해도 그렇고 옷이든 가방이든 꽉 끼거나 빠듯한 것보다 뭐든지 품이 넉넉한 것을 좋아하는 터라 내게는 조금 크겠다 싶었지만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방이 크다보니 꼭 필요한 방송 멘트와 자료들 외에도 즐겨듣는 여러 개의 cd와 힘이 모자랄 때 먹는 비상식량(초콜릿, 목 캔디, 비스킷 두어 개)을 비롯해서 꼭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물건들도 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내 가방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내 인생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내 마음의 가방에 너무 많은 것을 넣고 다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쩌다 내게로 와서 내 것이 되어버린 큰 가방처럼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내게는 너무도 버거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 몫이라고 떠넘겨진 상황이나 기대에 대해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려 애써왔던 것이 더 많은 짐들을 가중시켜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어깨가 늘 뻐근했던 건 아닐까요?

이제는 무거운 가방일랑 저만치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너의 책임’이라는 말로 내 어깨에 지우던 무거운 짐을 벗고 싶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책임’의 범위에서 가벼이 살고 싶습니다.
꼭 필요한 물건들만 넣을 수 있는 아담한 크기의 가방 하나 새로 장만하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no!'를 잘 사용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