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감정의 치유

작성자 조금엽

등록일 2006-12-13

조회수 1278

며칠 동안 본의 아니게(?) 데이빗A.씨맨즈의 ‘상한 감정의 치유’를 읽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한 번, 5년 전에 또 한 번 그리고 다시 펼쳤습니다. 
더러 읽었던 기억이 나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은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 개념이나 상황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절실한 문제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상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심각한 정서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성령충만 하면 모든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가슴 아픈 상처들을 계속 억누르거나 은폐합니다. 아니면 자유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학대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런 상처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치료하지 않고 묻어둔 상처는 속에서 곪아 터져서 우울증, 이상한 행동, 불행한 가정과 같은 더 큰 상처로 덧나고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상처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슷한 상처를 입히고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낮은 자존감이나 완전주의가 문제가 될 때 그것은 자녀에게 그대로 옮아가고 그 자녀는 다시 대물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상처를 입히게 되니 어쩔 수 없이 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은 함께 상처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이없는 이 고리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선 상처에 대해 보다 솔직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진정으로 낫기를 바란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자신의 상처와 대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표현방식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옳지 못하면 옳지 못하다고 해야 하고 부당하면 부당하게 느낀다면 그렇게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화가 나는데 덮어두고 참는 것만 능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거기다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해 참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가혹하고도 나쁜 일입니다. 
우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는다고 해서 울음이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는 그칠지 모르나 오히려 더 큰 슬픔이 가슴 속에 남아 마침내 몸이 소리 내어 울게 될 테니 말입니다. 
마음이 아파 몸이 우는데 아무리 좋은 약을 먹는다 한들 그 병이 나을까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엉뚱한 처방으로 병이 나을 수 있을 거라 착각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시간만 지나면 해결이 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집니다. 
잠시 가라앉을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한강의 ‘괴물’처럼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으로 나타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사람이 풀어야 할 것이 있다면 사람이 풀어야 할 것입니다. 

치유란 ‘하나님께서 재생시키는 은혜를 사용하시어 우리를 고치시는 기적적인 일이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습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속에서 절규하는 이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각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주께서 우리를 재생시켜 주심으로 온전하고 유용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기대하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