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격이 없지
작성자 조금엽
등록일 2006-12-14
조회수 1267
한 편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냉골방서 밤낮 자개 붙여 월15만원 받아요’
상관없이 살았던 여성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요즘이기 때문일까요?
이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아무개(47) 아주머니의 눈빛은 형형합니다. 팍팍한 세월을 거치며 찌든 고단함보다는, 그것을 이겨낸 강인함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기자가 묵는 서울 상계동 양지마을의 이웃입니다. 지난 12일 10평짜리 아주머니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연달아 화통한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도 던져가며, 지난 삶을 이야기로 맞이해줬습니다.
그는 40년째 양지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동갑내기 남편과는 1991년에 결혼했습니다. 부모가 “도끼자루 들고 말릴 때” 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10년을 넘게 살았지만 정작 남편과 ‘살 붙이고’ 산 해는 3년도 안 됩니다. 남편은 사기·폭행 등 온갖 죄목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렸습니다. 경제적인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에 들지 않아 나라의 지원도 못 받았습니다.
단 한 차례, 남편이 2002년에 불쑥 1500만원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지금 사는 10평짜리 집에 전세로 들어왔습니다. 그 전에는 오래도록 보증금 100만원, 월세 10만원짜리 판잣집에서 지냈습니다. 주변 집들은 모두 철거되고 달랑 남은 한 채였습니다. 그곳에서 미싱일을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벌판에서 혼자서 일하는 기분”이었답니다.
미싱일은 중학교를 중퇴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벌이가 좋았던 90년대 초에는 한 달에 70만원까지 벌었습니다. 밤낮으로 미싱을 돌리다 보니, 첫째딸은 아기 때 미싱소리가 멈추면 잠에서 깼습니다. 98년 무릎을 다친 뒤로는 미싱일도 못합니다.
다리가 불편해 바깥 일을 못하니까, 집에 앉아 자개 붙이는 일을 합니다. 자개 조각을 가로 25㎝, 세로 15㎝인 종이에 붙이면 400원을 받습니다. 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 달을 꼬박 일하면 15만원을 받습니다. 어두우면 이 일을 못하는데, 이 집은 낮에도 문을 닫으면 방이 컴컴합니다. 전등을 켜자니 전기세가 아깝습니다. 햇빛이 들게 문을 열어놓고, 대신 옷을 껴입고 일을 합니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기름값 걱정으로 보일러를 틀지 않습니다. 어지간히 춥지 않으면, 두 평 공간에 전기장판을 깔고 모녀 셋이 함께 잡니다. 그나마 재작년에 이혼하고 나니 기초생활 보장 수급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달에 41만원 가량 나옵니다. 두 딸과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턱도 없이 모자랍니다.
중학교 3년인 첫째딸은 요즘 말을 안 듣습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사는데 …” 하는 생각이 들어 속상합니다. 조숙한 둘째딸(초등 6)은 어머니로서 보기에 “아깝습니다. ” 미술을 잘하고, 또 하고 싶어 하는데, 돈이 많이 들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엄마가 주변에서 뭐든 자꾸 주워오니까, 둘째가 여섯살 때 하루는 남의 집 쓰레기에서 바구니를 주워 들고 왔습니다. 그 뒤로 아주머니는 아이들 몰래 물건을 주웠습니다.
이런 일들이 떠오를 때일까요. 가끔은 혼자 소주 한 병을 마시면서 운답니다. 아주머니는 그 이야기마저도 걸지게 합니다. “미친 년도 아니고 말야 …” 그러곤 어느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바꾸더니, “나는 평생 ‘아줌마, 커피 주세요’ 하면서 살 줄 알았어!” 합니다. 기자는 함께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못했습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어제는 마음이 조금 어수선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던 중 양지마을 그녀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녀 나이 마흔 일곱, 내 나이 마흔 일곱.
그녀의 삶을 보고 내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입을 다뭅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합니다.
‘나는 자격이 없지, 투덜거릴 만한.’
‘냉골방서 밤낮 자개 붙여 월15만원 받아요’
상관없이 살았던 여성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요즘이기 때문일까요?
이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아무개(47) 아주머니의 눈빛은 형형합니다. 팍팍한 세월을 거치며 찌든 고단함보다는, 그것을 이겨낸 강인함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기자가 묵는 서울 상계동 양지마을의 이웃입니다. 지난 12일 10평짜리 아주머니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연달아 화통한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도 던져가며, 지난 삶을 이야기로 맞이해줬습니다.
그는 40년째 양지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동갑내기 남편과는 1991년에 결혼했습니다. 부모가 “도끼자루 들고 말릴 때” 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10년을 넘게 살았지만 정작 남편과 ‘살 붙이고’ 산 해는 3년도 안 됩니다. 남편은 사기·폭행 등 온갖 죄목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렸습니다. 경제적인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에 들지 않아 나라의 지원도 못 받았습니다.
단 한 차례, 남편이 2002년에 불쑥 1500만원을 건넨 적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지금 사는 10평짜리 집에 전세로 들어왔습니다. 그 전에는 오래도록 보증금 100만원, 월세 10만원짜리 판잣집에서 지냈습니다. 주변 집들은 모두 철거되고 달랑 남은 한 채였습니다. 그곳에서 미싱일을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벌판에서 혼자서 일하는 기분”이었답니다.
미싱일은 중학교를 중퇴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벌이가 좋았던 90년대 초에는 한 달에 70만원까지 벌었습니다. 밤낮으로 미싱을 돌리다 보니, 첫째딸은 아기 때 미싱소리가 멈추면 잠에서 깼습니다. 98년 무릎을 다친 뒤로는 미싱일도 못합니다.
다리가 불편해 바깥 일을 못하니까, 집에 앉아 자개 붙이는 일을 합니다. 자개 조각을 가로 25㎝, 세로 15㎝인 종이에 붙이면 400원을 받습니다. 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 달을 꼬박 일하면 15만원을 받습니다. 어두우면 이 일을 못하는데, 이 집은 낮에도 문을 닫으면 방이 컴컴합니다. 전등을 켜자니 전기세가 아깝습니다. 햇빛이 들게 문을 열어놓고, 대신 옷을 껴입고 일을 합니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기름값 걱정으로 보일러를 틀지 않습니다. 어지간히 춥지 않으면, 두 평 공간에 전기장판을 깔고 모녀 셋이 함께 잡니다. 그나마 재작년에 이혼하고 나니 기초생활 보장 수급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 달에 41만원 가량 나옵니다. 두 딸과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턱도 없이 모자랍니다.
중학교 3년인 첫째딸은 요즘 말을 안 듣습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사는데 …” 하는 생각이 들어 속상합니다. 조숙한 둘째딸(초등 6)은 어머니로서 보기에 “아깝습니다. ” 미술을 잘하고, 또 하고 싶어 하는데, 돈이 많이 들 것 같아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엄마가 주변에서 뭐든 자꾸 주워오니까, 둘째가 여섯살 때 하루는 남의 집 쓰레기에서 바구니를 주워 들고 왔습니다. 그 뒤로 아주머니는 아이들 몰래 물건을 주웠습니다.
이런 일들이 떠오를 때일까요. 가끔은 혼자 소주 한 병을 마시면서 운답니다. 아주머니는 그 이야기마저도 걸지게 합니다. “미친 년도 아니고 말야 …” 그러곤 어느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바꾸더니, “나는 평생 ‘아줌마, 커피 주세요’ 하면서 살 줄 알았어!” 합니다. 기자는 함께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못했습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어제는 마음이 조금 어수선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던 중 양지마을 그녀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녀 나이 마흔 일곱, 내 나이 마흔 일곱.
그녀의 삶을 보고 내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입을 다뭅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합니다.
‘나는 자격이 없지, 투덜거릴 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