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라우마
작성자 조금엽
등록일 2013-05-03
조회수 892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괜찮은 게 아니었음을 한참이 지난 요즈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일흔셋의 시어른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신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했습니다.
나의 결혼생활은 남편과 함께 했던 시간보다 시아버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아버님을 모시기 위해 시집을 온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고 잠이 드시기까지 아버님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노라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나날과 다른 이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셨던 내면의 깊은 이야기까지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버님은 그렇게 19년을 계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5년 후, 시어머님 또한 소천하셨습니다.
시어른이 소천하신 후 김씨 집안의 맏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접고 비로소 내 부모님의 둘째 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 또한 건강이 좋지 못하셔서 병석에 계시다 3년여 만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2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는 줄곧 병원과 가까이 하며 살았습니다.
부모님의 반복된 입원과 퇴원 속에서 항거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의 무력함, 고단함, 절망, 아픔과 슬픔이 거북이 등딱지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마음을 무겁게 누르곤 했습니다.
특히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의 고통스러운 감정과 막막함은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임종의 시간, 가쁘게 숨을 몰아쉬시다 손을 놓으시던 그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떠나신 뒤,
나는 3년이 넘도록 큰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주 다니던 병원 앞을 지나는 것만으로 지난 시간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저리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난 4월, 몸이 신호를 보내오면서 남편이 급히 예약을 하는 바람에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습니다.
CT와 MRI 검사를 위해 통 속에 들어갔을 때,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계음 속에서 불안해 하시며 나를 찾으시던 부모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수면내시경으로 마취가 다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CT 조영제 부작용으로 알레르기 주사를 맞고 허느적거리며 검사실 복도 의자에 기대앉았을 때,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누구라도 붙잡고 답답한 내 심정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서글펐습니다.
인생의 한 계절에 주어진 역할을 마치고
이제 자유로이 날아가겠다 싶었더니
발목을 잡는 복병이 있었다니요..
아름다운 계절이건만 조금은 우울한 5월,
스러지는 내 마음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며 말합니다.
내 인생의 기쁨의 날이 그러했듯이 슬픔의 날에 대한 책임도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을진대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는 가에 따라 남은 삶의 행복과 불행의 분량이 결정될 것이라고.
그런데 괜찮은 게 아니었음을 한참이 지난 요즈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일흔셋의 시어른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신 지 6개월 만에 결혼을 했습니다.
나의 결혼생활은 남편과 함께 했던 시간보다 시아버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아버님을 모시기 위해 시집을 온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고 잠이 드시기까지 아버님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노라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나날과 다른 이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셨던 내면의 깊은 이야기까지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아버님은 그렇게 19년을 계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5년 후, 시어머님 또한 소천하셨습니다.
시어른이 소천하신 후 김씨 집안의 맏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접고 비로소 내 부모님의 둘째 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 또한 건강이 좋지 못하셔서 병석에 계시다 3년여 만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2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는 줄곧 병원과 가까이 하며 살았습니다.
부모님의 반복된 입원과 퇴원 속에서 항거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의 무력함, 고단함, 절망, 아픔과 슬픔이 거북이 등딱지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마음을 무겁게 누르곤 했습니다.
특히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의 고통스러운 감정과 막막함은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임종의 시간, 가쁘게 숨을 몰아쉬시다 손을 놓으시던 그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떠나신 뒤,
나는 3년이 넘도록 큰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주 다니던 병원 앞을 지나는 것만으로 지난 시간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저리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난 4월, 몸이 신호를 보내오면서 남편이 급히 예약을 하는 바람에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습니다.
CT와 MRI 검사를 위해 통 속에 들어갔을 때,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계음 속에서 불안해 하시며 나를 찾으시던 부모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수면내시경으로 마취가 다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CT 조영제 부작용으로 알레르기 주사를 맞고 허느적거리며 검사실 복도 의자에 기대앉았을 때,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누구라도 붙잡고 답답한 내 심정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서글펐습니다.
인생의 한 계절에 주어진 역할을 마치고
이제 자유로이 날아가겠다 싶었더니
발목을 잡는 복병이 있었다니요..
아름다운 계절이건만 조금은 우울한 5월,
스러지는 내 마음을 붙들어 일으켜 세우며 말합니다.
내 인생의 기쁨의 날이 그러했듯이 슬픔의 날에 대한 책임도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을진대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는 가에 따라 남은 삶의 행복과 불행의 분량이 결정될 것이라고.